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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도시재생의 해방구 되다 ①

해방촌의 역사적 변천과 도시조직의 형성 과정

이인해 기자  |  2017-03-13 10:27:54
최종수정 : 2017-03-17 1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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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의 역사적 변천 과정/자료=urban114]

 

남산 아래 첫 마을인 해방촌은 1945년 광복 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과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 피난민 등이 임시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주요 골격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돼 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과 피난민들의 보금자리라는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미군 군용식량(C레이션) 박스와 판자 등으로 손바닥 만하게 지은 소위 ‘하꼬방’은 해방촌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후 2012년 용산구에서 해방촌에 벽화사업을 진행하면서 ‘예술마을’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으며 이곳에 정착한 예술가들이 모여 축제를 열고 공방과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단순히 상업적으로 부상하는 공간이 아닌 예술적인 면모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변천과 도시조직의 형성 과정

 

해방촌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남산자락에 위치한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으며,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조선시대 역원 중 하나인 이태원이 있어 도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했다. 이후 지금의 용산 지역에 일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이태원과 후암동을 중심으로 일대가 시가화되었고, 일본 주둔군과 가족들의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해방촌은 구릉지라는 지형적 특성과 군사기지, 남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해방 후까지도 개발과는 동떨어진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해방촌 도시조직의 형성 과정/자료=urban114]

 

1940년대 후반 이 일대에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유사한 도시조직의 골격이 나타났다. 구릉지 정상에 집을 마련한 주민들은 도심으로 가기 위해 주거지와 비슷한 표고의 길을 따라 걸어 다녔고, 주요 가로를 따라 중심상업시설인 신흥시장이 형성되면서 해방촌 오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해방촌이 조성되었다. 해방촌은 지역의 대부분이 국유지·시유지였고, 인근에 상수도 역할을 하는 남산 물길이 있어 도로와 상수도 등의 기반시설이 설치됨에 따라 다른 천막촌과는 다르게 비교적 안정적으로 주거지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이 지역은 주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착민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교육이 이루어졌고, 사회복지에 의한 주거환경 안정화, 공공 인프라의 확충, 신흥시장 중심의 상업기능이 더해져 도심 주거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점진적인 개발을 통해 안정된 도심 주거지로 자리 잡았는데, 이때 대부분의 무허가 판자촌이 토지정리사업을 통해 유기적 형태의 도시조직에서 격자형 필지로 구획, 정리되었다. 지역의 외곽으로는 남산 순환도로(1963년)와 남산 2호 터널(1970년), 3호 터널(1978년)이 건설되면서 해방촌의 물리적인 경계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이태원 쪽으로의 면적 확대가 불가능해지면서 지역의 고밀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1970년 12월에 개통된 남산 제2호 터널/자료=e-영상역사관]

 

1973년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면서 해방촌에 처음으로 공공의 의한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었다. 기존의 주요 가로는 유지하고 각 블록의 필지구조는 주민들의 합의와 공무원들이 조율해 새로 계획했다. 불규칙적이었던 블록은 정형화되었고, 유기적인 가로망은 확폭 및 신규 개설을 통해 연결성을 높이면서 변형된 격자망의 형상을 갖추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현지개량방식에 의한 재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해방촌 일대 절반 지역들의 주거기능이 강화되고 양호한 주거환경으로 변모했다. 이후에는 산발적으로 도로 포장, 기반시설 설치 등의 공공에 의한 정비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개별필지 단위로 토지소유자들의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블록이나 가로망, 필지구조는 거의 변함없이 지속돼 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해방촌은 오랜 기간 각종 개발에서 소외돼 온 까닭에 지금도 여전히 노후한 주택과 지붕이 내려앉은 폐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지어진 건축물도 최고고도제한으로 대부분이 4층 이하다. 1943년 일제가 경성호국신사를 지으면서 참배길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사의 흔적은 사라진 채 외따로 남겨진 108계단, 피란민의 안식처 역할을 한 해방교회, 해방촌성당 등 역사적인 공간도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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